[르포]경계를 묻는 시간, 제9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20

지난달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CGV 인천연수에서 개최된 제9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개막 첫날, 그 현장을 찾았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지켜온 유대인의 삶을 의미했으나, 그 의미가 확장돼 정치적 난민, 이민자, 소수 인종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2013년 시작해 올해로 9회차를 맞이한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사회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는 상영작과 대담 및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해 관객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의 장을 열었다.

낯선 곳으로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는 일은 설레지만 두려움이 따른다. 서울에 거주한 지 9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은 나에게 넓고 복잡하기만 하다. 아직도 가끔 그 안에서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르포 취재를 위해 인천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내가 느꼈던 낯선 거리감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도 앱을 켜서 도착지에 ‘CGV 인천연수’를 입력했다. 잠시 후 뜬 창에는 소요 시간 ‘2시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를 반겼다. 순간 아득했다. 평소에 1시간 반을 넘기며 이동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도착하기까지 지하철을 3번이나 환승해야 했다. 도중에 역을 지나치지는 않을까. 도착해서 길을 헤매진 않을까.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걱정들은 ‘멀다’는 거리감보다는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비롯했다. 마치 외국에 혼자 떠나온 여행객이 된 기분이었다. 향하는 길 내내 지도 앱이 켜진 핸드폰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웰컴, 디아스포라

인천1호선 동춘역 1번 출구로 나오자 옅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초행길에 맞이하는 비가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가까이에 스퀘어원 건물이 보였다. 시간은 오후 1시 40분. 오후 2시에 상영이 시작하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스퀘어원으로 이어지는 도보 왼편엔 넓은 도로와 분주한 차들, 높은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연수구’라는 낯선 지명과 달리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번 영화제는 CGV 인천연수 단 한 곳에서만 열렸다. 개최 기간 3일로 단축, 상영관 관객 수 50% 제한, 전면 사전 예매 진행 등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영화제 규모가 자연스레 축소됐다. 자원봉사자들은 입장하는 관객들을 소독액이 분사되는 출입구를 통과하도록 안내했다. 그 너머로 기다렸던 영화제 풍경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영화제 안내 부스들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빨간 안내선을 따라 줄을 서고 체온 측정과 QR 인증, 티켓 수령을 차례대로 진행했다. 로비는 영화제에 온 관객들과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였다. 벽 한 면을 빼곡하게 채운 영화제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디아스포라영화제 현장 매표소 부스. 관객들이 티켓을 수령하고 있다.

이번 포스터는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방향성을 ‘무아레(moire)’로 표현했다고 한다. 무아레는 반복되는 무늬가 겹쳐질 때 물결처럼 일렁이는 시각 현상을 말한다. 서로 다른 무늬가 만나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영화제가 추구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화합’이라는 가치를 찾아볼 수 있었다. 발권받은 티켓에도 생동하는 무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구별 방랑자>가 말하는 평화

이번 영화제부터 제작 국가를 기준으로 ‘디아스포라 월드와이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나뉘어있던 기존 상영 부문을 상영 시간에 따라 ‘디아스포라 장편’과 ‘디아스포라 단편’으로 재정비했다. 상영 부문까지도 고려하는 영화제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장편 부문 다큐멘터리, 유최늘샘 감독의 <지구별 방랑자(2021)>를 관람했다.

<지구별 방랑자>는 감독이 40여 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나 제목만 보고 낭만적인 여행, 혹은 이국적인 풍경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전거 여행자, 난민, 타투이스트, 아이스크림 판매원, 원주민, 어린아이들… 한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있고, 타국에서 떠나온 난민도, 세계 곳곳을 떠다니는 여행자도 있다. 유최늘샘 감독이 든 카메라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꾸밈없이 포착한다. 그 여행길 위에는 악역도, 선한 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차별과 위협, 외로움과 환대를 경험하는 방랑자들이 있을 뿐이다.

<지구별 방랑자>에는 인종, 나이, 종교를 넘어 내일의 평화와 자유, 사랑을 말하는 언어들이 부유한다. 지구별을 방랑하는 감독과 그가 만난 방랑자들이 들려주는 합주가 정겹게 들리는 이유다.

영화제의 바깥에서

상영이 끝난 후에 여유롭게 다시 영화제 현장을 둘러봤다. 기념품 부스에서는 포스터와 스티커, 엽서를 무료로 제공했고, 설문지를 작성하면 핸드메이드 팔찌와 열쇠고리도 가져갈 수 있었다. 입구 바깥에 위치한 포토 부스에서는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무아레 패턴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출력할 수 있었다. 스퀘어원 건물 야외 ‘환대의 광장’에는 영화제 행사 부스들이 마련돼 있었지만, 당일 우천으로 모든 야외 행사가 취소됐다. 비어있는 부스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텅 빈 환대의 광장이 허전해 보였다.

△인천 스퀘어원 야외에 비어있는 ‘환대의 광장’.

예상치 못한 우천으로 하루 동안 영화제 곳곳을 둘러보겠다던 당찬 계획은 방향을 잃었다. 그렇다고 바로 인천을 떠나기엔 아쉬웠다. 환대와 이주의 도시라고 불리며, 지금껏 디아스포라영화제의 무대가 되어주었던 인천. 1902년 한국 최초의 이민선이 인천항에서 떠난 이후, 현재까지도 인천의 항구와 공항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영화제 바깥에서, 인천을 가까이 둘러보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송도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도착하니 비는 어느새 그쳐 하늘이 맑고 화창했다. 날씨에 화답하듯, 세련된 고층 건물들과 각종 조형물, 반듯이 조성된 공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거나, 잔잔한 물살 위에서 보트를 타는 시민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빈틈없는 조화로움 속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송도 센트럴 파크 전경. 건물들이 높게 솟아 있다.

경계 없이 퍼지는 빛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달리는 지하철 창 너머로 풍경들이 빠르게 바뀌었다. 차들의 불빛이 번지듯이 보였다. 문득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영화제 로고를 설명하던 글이 떠올랐다. 중심 사회 주변으로 경계 없이 퍼지는 빛, 디아스포라 존재들을 표현했다던 빛무리. 창 너머의 움직이는 불빛들이 그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제9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막을 내렸지만, 디아스포라는 현재다. 오늘날 우리는 난민, 추방, 이민 등 다양한 형태의 이주를 경험한다. 비단 국적에 관한 이주만이 아니다. 다양한 정체성이 부딪히고 생동하는 시대 위에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낯섦을 감각하고, 화합과 공존의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취재 | 홍은솔 기자
사진 | 김다영 기자

avatar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