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타인의 노동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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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빼앗긴 노동자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벌써 16번째다. 작년 한 해에만 16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했다. 이를 잇듯 새해 1월부터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의 부고가 전해졌다. 택배 노동자들은 높은 업무 강도와 동료들의 죽음에 분노하며 파업을 예고했다. 그러자 비난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라”, “배불렀네”, “택배가 갑이네” 등 노동자들의 시위를 매도했다. 삭막한 댓글 창을 보니 숨이 막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뒤, 법은 바뀌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전태일 열사 50주기가 지난 지금, 전태일은 산화되고 사람들에게는 메마른 반노동 정서만이 남은 듯하다.

노동자가 권리 요구를 위해 파업한다는 기사에는 대개 부정적인 댓글이 달린다. 사람들은 저임금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처우를 그들의 탓으로 돌린다. 적은 임금을 받고 인권 탄압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학창 시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혹자가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노동자를 보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난은 저임금 노동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노동조합(이하 노조)의 파업에 더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월급 많이 받는 것들의 배부른 소리’라며 귀족노조의 떼쓰기로 매도한다.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 인권 문제, 안전 인력 부족 등의 어두운 현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의 노력으로 노동자를 평가하고 투쟁을 ‘배부른 소리’로 일축 시키는 태도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몸 바쳐 일한 시간과 노력 또한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다만 우리는 모두 인간답게 일할 권리가 있다.

반노동 정서는 노동자의 농성에서 당위성을 찾는 태도와 농성이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해타산적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부당한 처우를 고발하고 업무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노동자의 농성은 그 자체로 합리적이다. 학교 옆 건물공사로 소음이 난다고 해보자. 학생들은 공부에 지장을 받는다. 학생들과 학교는 공사 업체에 항의해서 소음이 덜 나는 방안을 협의하고 마땅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누구도 학생이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항의하는 행동을 보고 배부른 소리라 칭하지 않는다. 학생의 학습권과 자신의 이익을 연결해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권리는 때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노동자다.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은 참혹하다. 한국은 20여 년째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정부의 공식통계로만 해마다 약 2,000명 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지는 국가다. 하루 평균 6명의 노동자가 출근 후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작년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 국내 사망자가 지금까지 1,600여 명인 것을 보면 한국의 노동자에겐 일터의 사고가 코로나19보다 무서운 존재다. 한국의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재난 속에서 일하고 있다.

산업은 빠르게 변화해왔다. 언제부터인지 하청, 특수 고용, 일용직과 같은 책임을 전가하는 밑바닥 노동 행태가 증가했다. 그 과정에서 사각지대는 확대됐고 해고는 쉬워졌다. 엘지(LG) 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하고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배달과 같은 비대면 플랫폼 사업은 코로나19 상황 속 큰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비대면과 비대면 사이를 메우는 노동자들은 택배 상자를 나르다 쓰러지고, 시간에 쫓겨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영영 눈뜨지 못한다. 편리함과 저렴한 가격은 임금과 근로 조건, 노동권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까지 뒤로 밀어냈다.

갈수록 노동 양극화가 심화되고 대기업이 중심이 되는 한국에서 잊혀가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노동자 간의 공감과 연대는 필수적이지 않을까. 오늘 출근길 혹은 등굣길에서 본 파업 노동자는 내일의 또 다른 나다.

노동자의 외침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침묵하는 태도는 타인의 노동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다. 어느새 열악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일하다 눈을 감은 노동자의 죽음에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자의 외침에 이익만을 좇는 사회가 됐다. 노동자는 공감이 메마른 겨울 속 앙상한 나무가 되어 외롭게 노동한다. 차갑고 숨 막히는 겨울 속을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봄이 왔다. 노동계에도 따뜻한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글 | 김다영 기자

*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중분류별 사망자 수 (200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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