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고]익숙함이 만든 우리의 무감각함(‘폭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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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채 복도에 길게 늘어선 학생들의 행렬, 나 역시 그 속에서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제발 나는 살살 맞게 해주세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신음과 선생님의 발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이내 커다란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다 나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고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쓰러진 것도 잠시, 손을 털고 일어나 내 뒤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신음은 여전히 복도를 울렸고 한쪽에서는 먼저 맞은 친구들의 작은 웃음이 들렸다.

한없이 높아 보이는 체육관 단상 위에 올라선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다 함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열아홉!”

숫자와 숫자 사이, 그 짧은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 침묵이 계속되길 기도했다.

“스물…!”

이내 터져 나온 가냘픈 목소리에 누군가는 작은 탄식을, 누군가는 욕설을 내뱉었다. 사백여 개가 넘는 눈동자는 한꺼번에 소리의 출처를 향해 움직였다. 우리는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폭력에 노출된 한 사람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 눈길은 얼마 가지 않아 더욱 큰 가시를 품은 체 서로를 향했다. 그리고 이 섬뜩한 폭력 현장에서 벗어났던(어떤 이유에서든) 소수의 인원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인권을 탄압했던 폭력의 현장은 우리들의 철저한 개인플레이 현장이었고 그 모습은 흥미로운 예능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체벌이라는 견고한 악의 굴레에서 겪은 무뎌진 감정이자 익숙함에 대한 학습의 결과물이었다. 나의 기억 속 폭력의 현장이 더욱 섬뜩한 이유는 그곳에서 모두가 훌륭한 ‘폭력의 학습자’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나’라는 등장인물은 언제나 피해자임을 강조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친구가 맞는 모습을 보고 웃었던 A이자 친구의 실수에 욕을 내뱉었던 B로, 집단 얼차려를 흥미롭게 바라본 C로도 기억 속에 존재한다. 학교라는 닫힌 집단은 폭력을 익숙하게 만들었고 익숙함은 분노할 본질과 대상을 잊게 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폭력에 무감각한 우리를 만들고 교육을 명분으로 폭력을 이용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것이 왜 두려운지, 그것이 폭력일 때 우리는 어떤 실수를 하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2020년 여름, 나는 또 한 번 사람들의 섬뜩한 시선에 몸서리치고 말았다. 폭력을 별생각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생각보다 많았다. UDT 훈련 체험 콘텐츠는 시장 논리 아래에서 프로그램화되었다. <가짜사나이>가 바로 그것이다. 대중들은 <가짜사나이>를 열광적으로 소비했다. 그 소비자의 중심에는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도 있었다. (폭력의 현장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또 다른 폭력은 향수와 쾌감의 일종일까) 하지만 ‘진짜가 되기 위한 가짜들의 이야기’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내가 본 것은 무자비한 인권탄압의 현장이었다.

<가짜사나이>는 (‘폭력성’의 문제가 아닌 여러 문제로) 이제는 볼 수 없는 콘텐츠가 되었다. 하지만 6000만 회가 넘었던 조회 수가 우리가 얼마나 폭력에 익숙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지를 증명한다. 무감각한 대중이 존재했던 이상 우리는 생각 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짜사나이>에 열광했던 이유는 출연자들이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멀찍이서 바라본 적나라한 폭력과 고통의 현장이 즐거웠기 때문일까? 두 선택지 사이에서 일말의 고민이라도 남아 있다면, 글을 읽는 우리는 이미 폭력의 본질은 잊고 관대한 시선만 남은 (안타까운 혹은 무서운)사람이다.

내가 친구의 얼차려 웃으며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가짜사나이>의 등장 배경부터 무감각한 우리의 현실이 있다. 폭력은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꾸준히 사회에 침투하고 있다. 이제는 아이들조차 어떤 것이 폭력적인 행동인지 잊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일명 ‘대가리 박아’ 동작을 지시하며) 누군가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을 만큼 잔인했던 기억 속의 외침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들린다. 익숙해져서는 안 될 수많은 고통과 그것을 겪은 사람이 존재한다. 언제부터 폭력이 웃으며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된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경각심을 잃고 폭력을 뒷전에 둘 수 있게 된 걸까. 씁쓸한 현실도 익숙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글| 익명(미컨 2) 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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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매우 공감한 글입니다. 가짜사나이를 보면서, 많은 이들의 내면화된 군사적 사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체주의를 공동체주의로, 폭력을 성장의 과정으로 포장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