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고]성차별 교육으로 ‘연약해진’ 나의 몸에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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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자주 화가 난다. 이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몸에 느끼는 무력함에서 온다. 최근 인식하게 된 건, 난 도화지 앞에서도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이번 드로잉세미나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림 수업을 할 때 가장 속상한 건 (지정 성별) 여성 학생들은 도화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예요. 남성 학생들은 열심히 몸과 책상까지 뭍이면서 가득한 그림을 그려내거든요.” 도화지 전체에 ‘낙서’를 해본 적도, 색연필 등 미술 도구를 망가뜨린 적도, 옷에 묻어본 적도 없다. 그니까 미술 전공이 아니라 그냥 공교육에서 받아온 미술 시간과 몇 안 되는 그림이 여성인 나에게 그다지 놀이였던 적이 없다. 좀 더 가까운 말을 찾자면, 깔끔함을 요구받는 노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글씨체도 그림도 잘해야 놀림 받지 않는 것이었고, 잘함이라는 기준에 늘 기죽어서 도화지 한 장을 망칠까 겁냈다.

그림만을 얘기하고자 한 건 아니다. 나는 왜 살면서 학교 운동장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왜 난 몸을 강하게 움직이는 게 계속 부끄럽고 낯선가? 왜 소리를 강하게 질러본 적이 없는가? 난 요즘 나의 성향을 의심한다. 그리고 곧 역동적이지 못하는 나의 몸에, 이 몸을 만든 사회에 화가 난다. 강한 욕구에도 방황하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라인스케이트로 집 앞을 누비고, 분수에서 물이 나오면 다짜고짜 뛰어가는 건 잘했지만, 운동장을 한껏 뛰어다니는 남성 친구들에 한 번도 “어? 나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남녀공학’ 학교에서 분리된 성별이 익숙했는데, 여자중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이 입학한 여자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뛰는 이들과 체육 시간에 불타는 경기를 보는 것이 늘 낯설었다. 이미 굳어있는 몸을 피는 데까지는 다 나의 몫이었다. 점차 움직이는 데 있어 승부욕을 삭제시켰다.

학교 운동장은 어떤 성별을 떠올리는가?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은 어떤 성별이 떠오르는가? 성별에 따른 성향 차이가 아니라, 성별에 따른 사회화에 의한 차별이다. 기술과 가정에서 기술 교육과 가정 교육 대상은 성별로 규정되어 있었다. 난 인형을 좋아했는데, 오빠가 가지고 놀던 팽이, 딱지, 비비탄 총을 무척 다루고 싶어 했다. 단순히 운동과 장난감의 선택 여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총체적으로 몸에 솔직할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강보다 시선에 집착하고, 몸의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묻혀 자신 없는 몸이 남아있다는 것, 몸이 그저 성적 대상이 되는 것. 그 밖의 기회는 끝없이 자신의 싸움과 구조의 억압을 느끼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고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내게 “다칠까 봐”, “적당히”, “몸매보정?”이라는 말이 툭하면 들린다. 화가 나면 무언가 던지고, 소리를 쉽게 지르는 성별이 유독 잘 보일 때, 지금껏 표정으로만 화를 내온 나를 비교하게 된다. 감정 표현도 몸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자유롭지 못했다. 딱딱한 성차별주의 교육에 분노를 느낀다. 이 글은 개인의 글이라 두서없지만, 누군가 글 전체를 공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가끔은 이 기괴함이 나를 어디서부터 눌러왔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게 정교하다. 페미니스트로서 나를 마주하는 시선이 솔직해질수록 열이 뻗치는 속도의 폭은 자꾸만 빨라진다. 옛 교육으로부터 젠더불평등 학습을 받으면서도 여성인권 글을 쓰는 것으로 망설이게 하는 이 공간에 진절머리가 난다. 이분법적인 성(sex)으로 분리하기보다 트렌스젠더, 논바이너리, 인터섹스 등 다양한 성별체계와 정의하지 않는 것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도 계속 ‘여성’의 차별을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일한 이유에서다. 이미 ‘여성’으로 분리되는 차별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쓸 말이, 붙여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서 말을 눌렀다. 설득하고자 ‘객관성’을 찾아야 한다는 억압에서 벗어나 그저 개인적인 차별경험이 왜 같은 성별에 공감을 받는지 묻고 싶다. 그 공감이 수시로 분노와 불편함으로 작동한다고 전하고 싶다.

글| 박상은 (미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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