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누가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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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이십대.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 청춘, 생기, 역동성, 열정 이런 긍정적 표현들은 다 옛말이다. 요샌 누구도 섣불리 이십대를 행복한 시절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느덧 이십대의 이름표가 된 ‘n포 세대’처럼 현재 이십대는 기성세대가 당연하게 누렸던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조차 청춘 앞에 ‘아프니까’라는 단서를 달아 두었듯이 지금 이십대는 어느 세대가 보더라도 아프다. 문제는 너무 아파서 혼자서는 아픔을 해결할 수가 없다.

2013년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오찬호, 개마고원)은 이러한 이십대의 아픔을 서술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도서와 다르게 이십대의 피해자성과 동시에 ‘가해자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책의 한 대목에서는 이십대의 가장 대표적인 가해자성을 보여준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 난리가 난다.” 이는 6년이 지난 2019년에도 유효하다. 대학의 서열을 나누고 낮은 대학들을 무시하고 비하한다. 자신보다 (사회가 평가하기에) 낮은 서열에 다니는 사람 앞에선 떵떵거리다가 높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 앞에선 주눅이 든다. 대학 내에서도 수시, 정시, 편입으로 또 서열을 나누고 무시한다. 

대학 시간강사였던 저자 오찬호는 한 수업에서 KTX 해고 승무원들의 아픔에 무섭도록 냉담한 학생들을 만난다. 저자가 본 학생들은 KTX 승무원들의 요구가 과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투쟁에 동참하거나 공감할 생각이 없다. 그는 지금 이십대가 확실히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기성세대와 다름을 느낀다. KTX 해고 승무원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이십대 사이에서도 차별과 무시가 있고, 사회적 약자를 대할 때에도 그런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기계발 시대, 자기계발 세대

저자는 현재 한국사회를 ‘자기계발의 시대’로 규정한다. 사회는 개인을 상품으로 만들고, 개인은 더 나은 상품이 되기 위해 자기계발에 힘쓴다. 이십대는 자기계발에 가장 몰두하는 세대라 할 수 있다. 이십대의 자기계발의 특징은 오직 ‘취업’이라는 목적을 위할 때만 의미가 있고, 확실한 결과가 보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자신을 위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방해하고, 오직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게 한다. 열심히 자신을 희생하여 자기계발을 한다고 하여도 보장이 확실하지 않기에 늘 불안에 떤다. 또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자기계발에 게으른 사람을 보고 안위함으로써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정당화는 타인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가지게 하며, 자신보다 노력하지 않은 이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은 이십대를 여러 방면으로 병들게 하지만, 사회는 자기계발 하지 않는 이를 ‘낙오자’로 만듦으로써 이십대에게 자기계발 시시포스의 형벌을 내린다. 형벌의 굴레에서 이십대는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한 여학생은 (사회가 평가하기에) 나름 좋은 대학에 갔음에도 늘 자신의 대학을 소개하면서 “수능을 망쳐서….”라는 단서를 달아 둔다. 왜일까. 

청소년들에게 적게는 2년에서 많게는 5년을 수능 공부에 쏟는 것은, 그것이 대개 자의(自意)로 이뤄진다기보다는 낙오자(지방대생)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한다. 중고등학교를 지내며 ‘수능이 전부가 아니고, 수능을 위해 배우는 교육이 과연 좋은 삶을 위한 교육인지’ 의문이 들지만, 꾹 참는다. 수능점수가 낮은 이들에겐 너무 쉽게,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수능점수를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는 비정상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 비정상을 정상으로 굳게 믿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시 공부에 쏟는 지금이 ‘정당’해진다. 그렇게 청년들은 ‘수능점수=진리’ 공식은 내재화한다. 그 때문에 앞의 여학생은 너무 억울한 것이다. 자신이 노력한 정도는 원래 이 대학보다는 높은 수준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이 대학 수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저자는 이십대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드는 우리사회가 많은 청년들을 방황하게 한다고 말했다.

잘못된 기준을 내재화한 이십대는 더욱 그 기준을 견고히 지키려 스스로 괴물이 된다. 매번 “내가 수능을 망쳐서….”라고 말하는 것은 약과다. 자기계발의 내재화는 이십대가 타인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게 하며, 편견의 확대재생산을 부추기고, 주어진 길에 대한 맹목적 순종을 불러온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자기계발서 자체가 ‘모든 책임을 ’개인의 노력‘에 전가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답습해 다른 이들의 아픔도 그들의 탓으로 전가한다는 것이다. 지방대생들과 자신은 급이 다르다는 편견을 일반화하고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비정규직자의 투쟁에 대해선 “노력하지 않아 비정규직으로 들어갔으면서 날로 먹으려 한다”고 용산 철거민들에겐 “희생은 마음이 아프지만, 자영업자면서 이런 일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학비를 벌기 위해 새벽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같은 대학생에겐 “그런 사적인 고충까지 알아줘야 하느냐. 교내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지 않냐”는 식으로. 

자기계발이라는 신화의 끝? 그러나

저자는 “너희는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고, 이기적으로 군다”고 꼰대질 하기보단 이십대를 그렇게 만드는 구조의 부조리를 보여줌으로써 이십대 스스로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는 오로지 이십대에게만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십대도 분명한 구조의 피해자이기에.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십대를 괴물에서 벗어나게 해줄까. 저자는 모호한 해결책 대신, 현상분석을 통해 이십대가 사회 구조에 대한 물음표를 짓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 말한다. 해결책이 부재해 김이 빠지는 느낌이지만, 현상분석은 나름 날카롭다. 

저자의 분석 중 대부분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6년 전에 비해 변한 부분도 있다. 저자는 당시의 사회를 “자기계발의 시대”로 칭했다. 이제 과연 우리 시대를 자기계발의 시대라 단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자기계발 서적은 연간 도서판매량을 상위권을 줄줄이 꿰차지 않는다. ‘노력’만으론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일까. 청년들은 자기계발이라는 고리타분한 조언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자고 운동성을 띠는 것도 아니다. 자기계발서를 대체해 서점 베스트셀러 자리에는 소소한 일상들을 담은 에세이들이 놓여있다. 이러한 변화에서 ‘소확행’처럼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로 사회에서 받는 상처들을 치유하고자 함이 보인다.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청년’을 바라는 걸까. 그러나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가 절망적인 이상 개인의 행복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행복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복이 된”, 1등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서로 밟고 밟히는 게 일상이 된 사회를 바꾸지 않고 행복을 논할 수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늘 우리끼리 싸웠다. 그것은 우리가 원했다기보다 사회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십대의 문제는 이십대가 제일 잘 알고, 이십대의 고통은 같은 이십대가 제일 잘 이해할 것이다. 같은 고통을 느낀다면 서로 동감(同感)하기 쉽다. 이십대가 서로의 손을 잡을 때 앞의 인용문은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 ‘존중’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우리 사회가 바뀌기까지는 또 얼마나. 

글 | 양준하 기자

사진 | 서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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